유난히 순했던 천석꾼 집 아이
1924년 11월 15일 전남 목포시 북교동 184번지에서 부 차남진, 모 김남오 사이에서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대에는 무안군 삼항면 용포리에 살다가 목포가 개항되면서 복포시 죽동으로 이주한다. 반농반상으로 성공한 할아버지는 아들들을 일본유학을 보냈다. 차범석의 아버지는 부모가 남긴 유산을 잘 관리하고 간척 사업으로 성공한다. 차남으로 태어난 차범석은 어머니의 젖이 모자라 비싼 연유를 먹고 성장하였고 유모가 업어서 키울 정도로 부유한 유년을 보낸다. 차범석은 보통학교에 입학해서 졸업 때까지 줄곧 우등생으로 음악, 미술, 글짓기 등 예능 방면에 두각을 나타내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학력이 우수하고 품행이 방정'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 당시 목포에 서점이 두 곳이 있었는데 차범석은 전화로 새로운 책을 주문해서 모험소설, 탐정소설, 순정소설들을 읽으면서 문학적 재능을 키웠다.
예술과의 만남
차범석은 소년시절 일본인이 경영하던 목포 평화극장에서 당대의 무용가 최승희의 춤사위를 보고 막연한 예술 의지를 싹틔우기 시작한다. 보통학교 때까지는 평균이란 이름 불렀으나 광주고등보통학교를 입학하면서 아버지는 범석으로 개명해 주었다. 이 시절에는 주로 연예 소설에 관심을 가졌고 집 사랑채 서고에 있던 세계문학전집을 탐독한다. 광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고등학교에 응시했으나 낙방한다. 그때의 심정을 회색노트에 '회색의 계절'이란 감상을 적기 시작한다.
동경에서 2년간 생활할 때 연극과 영화, 여러 문학작품을 탐독 하면서 문학에 대한 열망을 하게 된다. 일제에 병역 징집되어 군복무를 하는 중에 도 수필, 시, 콩트 같은 짤막한 글들을 습작한다.
해방 후 교단에서 자신이 쓴 단막극 「폭풍젼야」를 습작하고 1949년 제1회 전국남녀대학 연극경연대회에서 희랍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번역하고 연출하여 우수상을 받았다. 전쟁 때문에 목포 고향 집으로 내려와 목포중학교에서 교사로 생활한다. '목중예술제'를 시작하여 연극반을 지도하면서 장차 극작가가 되기 위해 습작을 하게 된다.
단편 「추석전야」로 문단에 데뷔하다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희곡부문에 「밀주」가 가작으로 입선하여 본격적인 희곡 작가로서의 길을 가게 된다. 이후 해남의 강강술래를 모티브로 한 「귀향」이 같은 신문에 당선한다. 박화성 선생의 도움으로 서울로 올라와 덕성여고에 근무하게 된다. 그는 작가로서의 주제의식의 저변을 확대해간다. 1956년 전쟁 전에 교류했던 '대학극회' 동인들을 다시 모아 '제작극회'를 창단한다. 이 모임은 '토월회'나 '극예술연구회'가 미쳐 이루지 못한 소극장 연극 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이후 많은 극단들의 자극제가 된다. 50년대 차범의 작품 주제는 농어촌의 가난(『밀주』,『귀향』), 문명화에 때른 가치관 혼란(『볼모지』,『계산기』), 냉혹한 세태(『자동차』,『성난 기계』), 애정윤리의 혼돈(『무적』,『공상도시』)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주제는 리얼리즘 연극관 아래 역사의식에 기초한 현실의 객관적 재현과 휴머니즘에 입각한 인간의 본질적 전형의 창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예술과의 만남
고심하여 1961년에 탈고한다. 『산불』은 1962년 국립극단에서 초연으로 당시 화제가 되었고 영화와 TV 드라마로 각색되기도 하였다. 1963년 '연극의 전문화와 연극의 대중화'를 목표로 '산하'를 창단한다. 창작극으로 지방 순회공연을 하면서 많은 연기자와 연출가를 배출한다. 이 시기부터 작가의식은 사회비판적 고발의식에서 인간의 내면의식으로 변모한다.
산하 활동시기에는 국제결혼 문제를 소재로 사회적 변화를 단적으로 반영한 『열대어』, 남녀의 순수한 사랑을 그린 『환상여행』, 제5회 대한민국 연극제 희곡 대상을 수상한 『학이여 사랑일레라』가 있다. 차범석은 시대의 고민과 역사의식을 중심으로 한국 근대사의 선각자였던 인물들을 통해 교훈을 얻고자 하였다. 『새야새야 파랑새야』,『손탁호텔』,『화조』,『풍운아 나운규』,『이차돈의 죽음』,『새벽길』등이 있다.
연극행정가로서의 활동
1983년 극단 '산하'해체 이후 차범석은 대학 강단에서 연극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보이면서 극작 활동을 계속한다. 무용극『도미 부인』,『파도』,『고려애가』와 오페라 『산불』등의 작품을 내놓는다. 역사의 위기상황에서 선각자의 삶을 살았던 실존인물을 그린 두 편의 역사극이 있다. 『김안드레아전』은 가톨릭교회의 사제로 영/정조 때 한국 천주교의 정착과정에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생애를 극화한 기록극이다.이 작품은 공연되지 못하고 13회 서울 연극제에서 『사막의 이슬』로 개작하여 공연하였다. 『식민지의 아침』은 일제시대 독립운동가, 언론인, 민족학자였던 신채호 선생의 삶과 독립사상을 전기극 형식으로 만든 작품이다. 차범석은 이 작품에서 시와 음악, 춤, 다양안 매체를 활용하여 민중의 고통과 신채호의 삶의 의지를 표현하였다.
'산하'를 가슴에 안고 다닌 연극인
차범석은 2006년 작고하기까지 연극에 대한 열정을 간직한 작가였고, 그것을 작품 활동으로 증명해내었다. 강단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극단을 운영하고 연극행정가로서 많은 일을 해가면서도 활발하게 작품을 썼다. 작품뿐만 아니라 수필집 출간과 학술논문, 평론 저술 등을 통해 연극인으로, 문인으로, 교육자로서 다방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바른 생활 가운데도 차범석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온 목표를 잊지 않았다. 1998년 출간된 회고록 『떠도는 산하』는 책의 제목이며, 극단의 이름이기도 한 산하를 고향으로 치환하고 있다. '산하'란 나의 고향을 뜻하는 말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실존과 정신적인 환상이기도 하다. 어디에 있건 잊혀지지 않았던 내 고향 남도, 과거 50년 동안 할퀴고 억눌리고 천덕꾸러기로 버림받았던 내 산하 전라도, 그래도 나는 한 번도 포기도 절망도 안했고 언젠가는 기름진 땅에 초목이 무성하고, 천사가 오수를 즐기는 날이 오리라고 한낮에 단꿈을 꾸기고 했던 나의 70평생이었다. 그러고 보면 산하는 죽은 게 아니라 떠도는 신세였는지 모른다.
나의 극단이 그랬었고, 나의 고향 역시 그랬을 테니 산하는 떠돌다가 어느 날 수평선 저 멀리 함몰될 날을 기다리면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술화한 차범석은 2006년 8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