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의 시기
1949년 10월에는 제1회 전국남녀대학 연극경연대회에서 내가 번역하고 연출한 그리스비극 '오이디푸스 왕'으로 우수상을 받았는가 하면 1950년 4월에 중앙국립극장이 개관되면서 우리들 대학생들도 준회원 자격으로 연극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것은 한국연극의 여명이자 나의 인생 항로에서도 뚜렷한 등대불이요 나침반이었다. 1951년 봄 목표문화 협회가 주최하여 종합예술제를 개최했다. 연극은 나의 처녀작 '별은 밤마다'(2막)이며 내가 연출을 겸하고 주연까지 맡은 작품이었다. 나는 학생극을 올리면서 그때마다 적당한 텍스트가 없다는 장벽에 부딪쳤다. 그래서 출판한 게 《근대 1막극선》이었다. 버나드 쇼, 유진 오닐 그리고 죤 밀링톤씽의 단막극을 번역한 책이다. 나에게는 첫 번째로 낸 희곡집이다. 나는 단 하루도 희곡 창작을 향항 집념을 져버린 적이라곤 없었다.
'닭','제4의 벽','전암','풍랑'등 습작을 한 것도 이 시기였다. 해방 후에는 문인의 길 대신 교단에 서게 되었지만 비로소 문학의 표현 방향을 희곡으로 잡고, 학생들을 통하여 자신이 쓴 단막극 '눈 내리는 밤'을 연출하여 재능을 시험한다. 연희 전문학교에 진학해서는 더욱 희곡 창작의 기도를 달렸다. 단막극 '폭풍전야'를 습작하고 1949년 제1회 전국남녀대학 연극경연대회에서 희랍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변역, 연출하여 우수상을 받는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이러한 희곡 활동은 전쟁 중에 잠시 움츠려드는가 했더니 1951년 목포문화협회 주최의 중합예술제 2막 '별은 밤마다'를 연출 겸 주연을 하고, 학생들을 위한 번역 희곡집 「근대 1막극선」을 출간하게 된다.
제작 극회 활동 시-32세의 늦갂이 등단과 '제작극회'
1956부터 1963년 극단 산하가 창단되기 이전인 제작극회 활동의 시기는 작가 의식의 형성기이다. 1956년에 차범석은 제작극회를 조직하여, 연극의 상업화에 반대하는 소극장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전후 당시는 서구문화와 가치관의 서사극이나 부조리극과 같은 반리얼리즘적인 기법의 실험주의 극이 활발하였다. 그러나 차범석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한국의 현실과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재구성하고 나아가서는 새로운 인간형을 창조해 내는 사실주의에 전착하였다. 차범석의 리얼이즘 연극관은 역사의식과 휴머니즘이라는 이념 속에 수렴되어 있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사회현상은 물론 인간 내면적 갈들까지 해명함으로써 인간구원을 목표로 한 것이다.차범석은 전쟁이나 전후의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과 성문화의 변화나 세대간에 나타나는 가치관의 차이를 통하여 사회의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의 고통과 혼란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1950년대 희곡의 주제의식은 '전쟁의 상처와 피해자의 삶'과 '전후 사회의 변화와 인간의 소외'로 나눠 볼 수 있다.
농촌의 가는을 다룬 작품은 「밀주」,「귀향」을 들 수 있다. 전쟁 후 빈곤한 삶과 인간성을 바탕으로 현대의 기계 문명화에 대한 비판과 인간소외 문제를 다룬 작품에는 「계산기」,「성난기계」,「분수」,「공중비행」,「사차등」등을 들 수 있다. 차범석의 이러한 주제는 리얼리즘 연극관 이래 역사의식에 기초한 현실의 객관적 재현뿐만 아니라 휴머니즘에 입각한 인간의 본질적 전형을 창조해냈다.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희곡부문에 「밀주」가 가작으로 입선하면서 본격적인 희곡 작가의 길을 가게 되었다. 남도 방언의 자연스러운 구사, 가난한 어민의 세계에 대한 현실적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었다. 차범석은 전후작가로 분류될 만한 극작가이면서도 전쟁이라는 주제에 고착하지 않았다. 철저한 현실에 바탕을 둔 다양안 주제를 통한 현대적 서민 심리를 추구하는 작품 경향을 보여 유치진, 이해랑의 뒤를 잇는 사실주의 연극의 대표 작가로 꼽힌다.
전후문학의 1세대로서 50여년 동안 전통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희곡 작품을 발표해 왔으며 한국적 개성이 뚜렷한 사실주의 연극을 확립하는 데 공헌한 대표적 극작가이자 연출가, 방송작가, 비평가이면서 연극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작가 중 한 사람이다.
1956년 해남의 강강술래를 모티브로 한문단에 데뷔한 차범석은 이후 창작극, 창극, 번역극, 무용극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고, 그의 작품은 1950년대 「귀향」으로부터 80년대의 한국 연극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었다.
나는 1961년 첫 희곡집 『껍질이 깨지는 아픔 없이는』을 출간했다. 이 작품은 4.19를 소재로 한 작품이자 나의 최초의 정치극이었다. 야당국회의원이 변절하다가 최후를 맞는 비극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파는 일이 그 얼마나 추악한 일이여, 우리나라 정치풍토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그러한 철새족에 의해 흙탕물을 튕기는 실상을 주제로 삼고 있다. 그러나 희곡 『껍질이 깨지는 아픔 없이는』이 나에게 관련된 사연은 유별나다.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 소극장 연극만을 해오던 '제작극회'가 최초로 대극장 진출을 한 첫 작품이기 때문이다. 나는 1951년 목포에 있을 때 공연했던 처녀작 『별은 밤마다』의 후편이라고도 볼 수 있는 희곡 『산불』을 이미 그때부터 구상하고 있었다. 입산했던 한 빨치산이 하산한 이후의 경우를 소재로한 구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가 허물고 허물었다가 다시 쌓아올리기를 10년동안 되풀이 해왔다. 희곡『산불』은 10년만에 탄생한 나의 대표작이다. 서울공연에서 성공한 연극 『갈매기 떼』는 지방공연으로 이어졌다.내 고향인 목표 남일극장과 광주극장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연극이 끝난 후 고무신짝이 한가마니가 넘게 나왔다는 뒷소식을 전해 듣자 나는 반사적으로 엉뚱한 생각을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극단을 만들자, 전문적인 직업극단을 만들자 연극엔 관객이 없다는 체념은 우리가 지어낸 자기 변명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불도 그리고 갈메기떼도 관객동원에 성공한 이유는 제대로 훈련된 배우에 의해 제대로 앙상블이 조성된 연극이라는 점은 그 누구도 무시못할 것이다. 물론 연극 갈매기 떼에는 널리 알려진 스타들이 대거 출연했다는 장점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연극이 제대로 만들어졌을 때 관객은 결코 외면하지 않는 법이다. 유명스타를 보고 싶어하는 관객도 물론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지한 연기와 진실을 추구하는 작품을 갈구하는 관객도 있다. 그것은 반드시 서울에만 있는게 아니다. 지방에도 있다. 그리고 번역극이라야만 수준 높은 관객이 온다는 독선을 깨부셔야한다. 질 높은 창작극일지라도 뜻있는 관객은 이 하늘 아래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손님을 모아 돈을 긁어모으라는 상업주의 연극이 아니라 우리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우리들의 꿈을 함께 찾아나서려는 진실된연극을 찾는 관객은 반드시 있다.나는 그런 연극과 그런 관객을 찾아나서기 위해서는 제작극회와 결별하고 새극단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극단'산하' - 1970년대 작품세계
이 시기의 차범석은 극작술의 정립기로 사회피반적 고발의식에서 인간의 내면의식으로 작가의식이 변모했다. 이때부터 전쟁의 직접적인 상처가 어느정도 가라앉은 상태로 사회 부조리에 대한 고발에 관심을 가지고 상업성을 띤 애정물이나 역사극이 작품의 주요 경향을 이룬다. 우리사회의 문제를 한 가정이나 개인사에 응축시켜 제시함으로써 사회구조를 인간 상호간의 관계로 전환시키고, 개인적인 운명보다는 사회적이고 시대적인 운명으로 묘사하였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한 개인이 아니라 사회계층의 대변자의 유향적 인물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청기와 집』,『대리인』,『왕교수의 직업』,『갈매기 떼』,『파도가 지나간 자리』,『안개소리』등의 작품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차범석은 시대의 고민과 역사의식을 중심으로 한국 근대사에 선구자적인 삶을 산 석각자들을 통해 교훈을 얻고자 했다. 『새야새야 파랑새야』는 동학혁명을 배경으로 역사의 위기에서 시대에 편승하는 인물과 전봉준을 따라 시대의 양심을 저버리지 않는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반성과 교훈을 주고 있다. 『손탁호텔』(5막)에서는 시대를 앞서가고 민중을 꺠우치려던 선각자의 자주성과 인간성을 찾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1963년 극단 산하 창단공연의 막이 올랐다. 작품은 손창섭 원작, 임희재 각색 『잉여인간』을 이기하가 연출을 맡았다. 창단공연은 대체적으로 호평이었다. 다음작품인 『청기와집』이 제1회 동아연극상에 출품 천선녀가 영예의 인기상을 받았다. 당시 연극계는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극단 신협에서 작품의뢰가 들어왔다. 극단 '신협'은 당시 유일무이한 직업극단이었다. 극단 신협 재기공연으로 희곡 『갈매기 떼』가 1963년 6월 6일 개막되자 명동국립극장은 연일 인파로 몸살을 앓았다. 『산불』의 뒤를 이어 공전의 성과를 올렸으니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보람이요,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주로 좁은 소극장무대에서 궁색하게 연극을 만들어야만 했던 환경하고는 달리 보다 넓은 세계를 향한 또 하나의 연극적 시야가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았다.
MBC에 근무하면서 차범석의 많은 작품 중에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산불』을 10여년을 고심하여 1961년에 탈고하였다.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고통 받는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로 1962년 국립극단에서 초연되었다. 많은 관객이 몰려 국립극장의 유리창이 깨져 기마순경이 출동까지 하게 되는 화제를 낳았다. 외국 것의 모방이나 추종을 벗어나 흙냄새와 물소리, 바람소리의 영원한 고향을 상기시키는 연극의 산실로 연극의 대중화와 연극의 직업화를 목표로 1963년 '산하'를 창단하였다. 창작극으로 지방 순회공연을 하면서 많은 연기자와 연출가를 배출하였다. 이 시기부터 작가의식은 사회피판적 고발의식에서 인간의 내면의식으로 변모하였다.
신세대와 구세대의 갈등을 다룬 작품으로는 『청기와집』,『대리인』이, 정치계의 부정적인 면을 고발한 작품으로는 『갈매기 떼』,『셋이서 왈츠를』이 있다. 국제결혼 문제를 소재로 사회적 변화를 단적으로 반영한 『열대어』, 남녀의 순수한 사랑을 그린 『환상여행』, 제5회 대한민국 연극제 희곡 대상을 수상한 『학이여 사랑일레라』가 있다. 차범석은 시대의 고민과 역사의식을 중심으로 한국 근대사의 선각자였던 인물들을 통해 교훈을 얻고자 하였다. 『새야새야 파랑새야』,『손탁호텔』,『화조』,『풍운마 나운규』,『이차돈의 죽음』,『새벽길』등이 있다.
1980년대 이후
1983년 극단 '산하'를 해체한 이후 차범석은 대학교수로 후진을 양성하고 연극 행정가, 극작가 등으로 활동하였다.대한민국 문학상본상을 비롯해 여러 상을 수상하였고 희곡은 물론, 무용극, 악극, 오페라 대본까지 쓰면서 활동하였다. 80년대는 한국은 유신정권의 몰락과 함께 시대적 전환기를 맞았다. 1980년 5월은 차범석에게도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80년 초 미카엘 엔데 원작 『모모』를 각색하여 공연 준비 중이었으나 공연 개시일 보름을 남겨두고 직접적인 압박이 없음에도 단념하였다. 이후 역사극 창작에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 직접적인 동기는 고향 주변에서 일어난 참혹한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접하면서 현실에서 무기력한 연극인이지만 역사의식과 시대의 아픔을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내기 위해 역사극 창작에 힘썼던 것이다. 『김안드레이전』은 영·정조 시기 천주교의 정착과정에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를 모델로 했으나 공연되지 못하고 『사막의 이슬』로 개작되어 제13회 서울연극제에 참가하였다. 『식민지의 아침』은 단재 신재호의 삶과 독립사상을 전기극 형식으로 그린 작품이다.『학이여 사랑일레라』는 목포 앞 바다에 떠 있는 삼학도의 유래에 얽힌 전설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전설 속의 남자 주인공과 희생된 여성들의 대립에서 피해자였던 여성들을 학과 섬으로 형상화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자 했던 차범석은 절망을 느끼게 된 1980년의 '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의식표출이었던 작품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