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가 낳은 세계적인시인-노겸(勞謙) 김지하(金芝河, 1941. ~ 2022. 5. 8. )
본명은 영일(英一), 지하(芝河)는 필명으로 1941년 목포시 산정동 1044번지에서 동학농민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다.목포산정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중학교 2학년에 다니던 1954년 아버지를 따라 원주로 이주했다. 원주중학교 2학년으로 편입해 다니던 중 천주교 원주교구의 지학순(池學淳) 주교와 인연을 맺은 뒤 1956년 서울 중동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1959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한 이듬해 4·19혁명에 참가한 뒤, 학생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5·16군사정변 이후에는 수배를 피해 목포 등지에서 항만의 인부나 광부로 일하며 도피 생활을 하였다.
1963년 3월 〈목포문학〉 2호에 '김지하'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시 〈저녁 이야기〉가 처음으로 활자화되었고, 1964년 6월 '서울대학교 6·3 한일굴욕회담반대 학생총연합회' 소속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4개월의 수감 끝에 풀려난 뒤, 1966년 8월 7년 6개월 만에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69년 11월 고향 친구 김현의 도움을 받아 시 전문지 〈시인〉에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저항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1970년 〈사상계〉 5월호에 권력 상층부의 부정과 부패상을 판소리 가락으로 담아낸 담시 〈오적〉을 발표하였다. [오적]으로 인해 [사상계]와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의 발행인과 편집인이 연행되었고, [사상계]는 정간되었다. 김지하는 이때 [오적 필화사건] 으로 구속되었으나 국내외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석방되었다. 이후 희곡 [나폴레옹 꼬냑], 김수영 추도시론 [풍자냐 자살이냐]를 발표하였고, 그해 12월 목포를 시적 포티프로 삼은 첫 시집 『황토』를 발간하였다. 1980년 감옥에서 석방되어 1982년 두 번째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를 발간하였다.
1984년 사면 복권되고 저작들도 해금되면서 1970년대의 저작들이 다시 간행되었고, 이 무렵을 전후해 최제우(崔濟愚) 최시형(崔時亨) 강일순(姜一淳) 등의 민중사상에 독자적 해석을 더해 '생명사상'이라 이름하고 생명운동에 뛰어들었는데, 이때 변혁운동 진영으로부터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 당시의 시집으로 『애린』(1986), 『검은 산 하얀 방』과 최제우의 삶과 죽음을 담은 장시집 『이 가문 날에 비구름』(1988), 서정시집 『별밭을 우러르며』(1989) 등을 펴냈다.1990년대에는 1970년대의 활기에 찬 저항시와는 달리 고요하면서도 축약과 절제, 관조의 분위기가 배어나는 내면의 시 세계를 보여주었는데, 『일산 시첩』이 대표적인 예이다. 1993년 그동안 써낸 시들을 묶어 『결정본 김지하 시 전집』 3권을 출간하였고, 1994년 『대설 南』과 시집 『중심의 괴로움』, 1999년 이후 『김지하의 사상기행』과 시집 『화개』, 『유목과 은둔』을 펴냈다. 1998년부터 율려학회를 발족해 율려사상과 신인간운동을 주창하는 등 새로운 형태의 민족문화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김지하의 첫 시집 『황토』가 척박한 이 땅의 현실과 억압에 대한 울분과 저항의식을 드러내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오적』을 비롯한 일련의 담시들은 정치적 억압 및 경제적 질곡과 맞서 싸우는 문학적 응전 양식으로서의성격을 지니고 있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격렬한 저항의 몸짓을 지녔던 그의 시는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대결구조나 반역의 정신을 벗어나 순환구조나 탐구의 정신을 표방하고 있다. 달리 말해 이는 투쟁과 무기의 시로부터 통일과 사랑의 시로의 전환이자 서양적 세계관을 동양적 세계관으로 접수·고양시키는 구도의 성격을 지니는데, 그 중심주제는 생명사상이다.1980년대 말부터 그의 시는 내면성, 철학성, 사상성이 더욱 깊어져 절망과 죽음을 넘어선 새 삶과 새 생명에 도달하고자 하는 소망과 기다림을 담은 고요한 서정시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목포를 소재로 한 김지하의 시는 대부분 첫 시집 [황토]에 집중되어 있다.
1.산정리 일기 2.비녀산 3.성자동 언덕의 눈 4.용당리에서 5.황톳길등의 시가 대표적이다.
1에서 4까지 제목에 나타난 지명은 지금도 현전하며, 5의 시 속에 나오는 '부주산', '오포산'도 마찬가지다. 이들 시는 1961년 남북학생회담 남쪽대표 3인 중 한 사람으로 지명수배된 그가 학업을 중단하고 목포로 도피하여 항만인부생활 등을 하며 20대 초반의 피 끓는 젊음을 숨어 지낼 때의 체험을 모티프로 씌어진 것으로 보인다.그는 그 무렵의 기억을 쓴 산문 [고행]에서 목포를 "내 시의 어머니, 굽이굽이 한이 맺힌 저 핏빛 황토의 언덕들"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렇듯 김지하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반체제 저항시인으로,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생명사상가로 활동하고 있는 시인이자 사상가이다. 1970년대 내내 민족문학의 상징이자 유신 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의 중심으로서 도피와 유랑, 투옥과 고문, 사형선고와 무기징역, 사면과 석방 등 형극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하여 그는 1975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대되었고, 같은 해 감옥에서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로부터 로터스상을, 1981년엔 세계시인대회로부터 위대한 시인상과 브루노 크라이스키상을 수상함으로써 유사 이래 세계적인 시인의 반열에 오른 최초의 문인으로 기록되었다. 지금까지 김지하의 출생 주소는 목포시 대안동 18번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목포시청 지적과에서 확인한 호적부에 따르면 목포시 산정동 1044번지에서 출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가 산정초등학교를 다녔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앞 주소는 거리가 멀어 현실성이 떨어질뿐더러 영세상인이었던 그의 부친이 세들어 장사를 했던 집이었음을 감안할 때 그의 생가 터는 산정동 1044번지가 확실하다고 추정된다. 목포 유달산 뒤쪽 어민동산에 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