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살에 한글 깨쳐, 열한 살에 소설 쓰다
박화성은 항구도시 목포에서 태어났다. 일찍 개화한 가정에서 네 살 때부터 한글을 깨쳐 성경을 읽고, 다섯 살에는 한자를 해득하고 일곱 살 때부터 소설을 읽기 시작하였다. 집 안에 있는 신구소설을 다 읽은 후에는 어머니가 각처에서 소설책을 빌려다 주었다.
이 무렵에 읽은 책들은「옥루몽」,「삼국지」,「수호지」,「사씨남정기」등 많은 고소설과「치악산」,「추월색」,「귀의 성」등 신소설이었다. 박화성은 신동이라는 소문이 날만큼 머리가 좋아 1년에 몇 번씩 월반을 하여 열한 살에 고등과 4학년인 최고 학년이 되었다. 학과 공부도 많고 어려웠으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책을 읽어 그때 시력은 나빠졌다. 열한 살 때「유랑의 소녀」라는 소설을 쓴 후 '화성' 이란 아호를 스스로 지었는데 본명이 되다시피 하였다. 서울 숙명여학교에 진학하여 14세에 쓴「식물원」소설은 서울이 배경이었다.그 후 춘원의「무정」,「개척자」, 현진건의「희생화」,「빈처」등을 읽으면서 자신이 쓴 소설이 모방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기 선생님, 문학의 요람 영광에 가다
서울 숙명여학교 졸업 후 15세의 어린 나이에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아기 선생님이라는 별호가 붙었다. 열여덟 살 때 영광중학원으로 부임해 조 운을 만나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하게 되었다. 조 운과 몇몇 선생이「자유예원」을 만들어 매주 수필, 시, 시조, 단평 등을 발표하는데 장원을 하면 작품이 서울로 보내졌다.박화성은 세 편의 수필이 장원이 되어 서울에 있는「부인」지에 세 번 실렸다. 「정월 초하루」라는 수필을 읽은 조 운이 소설을 써보라 권하여「팔삭동」이라는 단편을 썼는데 박화성의 첫 창작인 셈이다. 조 운은 그동안 박화성이 모아둔 다섯 권의 문학노트를 정독 한 후 시와 산문 등의 예비지식을 알려주고 글에 대한 평도 간단하게 적어주었다. 그는「소설작법」,「시작법」,「희곡작법」과 일본 문인들의 작품집을 빌려주었다.박화성은 도쿠토미 로카의「자연과 인생」, 톨스토이의「부활」, 도스토예프스키의「죄와 벌」, 투르게네프의「첫사랑」, 빅토르 위고의「레미제라블」등 서구문호들의 방대한 소설들을 빌려 밤새워 정독하면서 문학영역의 기초를 닦았다. 영광은 박화성을 작가로 키워준 문학의 요람이었다.
단편「추석전야」로 문단에 데뷔하다
「추석전야」는 1924년 여름에 쓴 단편이다. 조 운은 계룡산에서 휴양하고 있는 이광수를 찾아가 박화성의「추석전야」를 보여주었다. 1925년「조선문단」1월호에 이광수의 추천으로 발표되면서 박화성은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추석전야」를 추천한 이광수는 "눈물로써 읽은 작품이다. 기교는 덜 되었고 지은 듯한 데도 있으나 높은 동기, 뜨거운 정서는 비참한 인생생활의 사실을 보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게 한다.우리는 우리 누이들 중에서 이렇게 정성 있고 힘 있는 이를 만나는 것을 심히 기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고 호평하였다.
이후 이광수는 박화성에게 편지를 보내 작품에 대하여 늘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조선문단」2월호에「추석전야」에 대한 김기진의 평이 실렸다.
"오직 박화성 작의「추석전야」는 그의 의도의 건전함이나 착상의 묵직함으로나 필치의 유려함으로 보아 잡기만 제하면 다 찬양할 만하다." 평소 말이 없는 함경도 출신 최서해는「추석전야」는 참 착상을 잘했어요. 최초의 작품에서 여직공을 주인공으로 하당이 젊은 여성으로선 장한일이 앙이겠소" 라며 격려를 해주었다.
일본여자대학 영문과에 합격하다
숙명여학교를 다닐 때 풍금을 잘 쳐 음악을 전공한다면 학교에서 교비로 일본유학을 보내주겠다는 제의가 있었으나 거절하였다.대신 오빠의 학비를 부담하면서 오빠가 자신의 학비를 부담해 줄 수 있을 때를 기다렸다. 도쿄유학을 위하여 교사생활을 그만두고 숙명여학교 신학제에 맞추어 1년을 더 다녔다.
졸업할 때 박화성은 숙명여고 창설 이래 최고득점의 졸업생이었다. 박화성은 일본여자대학 영문과에 들어가기 위해 도쿄에 건너가 나흘 간 시험을 보았다. 뇌빈혈이 심했던 탓으로 4일째 시험을 보고 난 뒤 쓰러지고 말았다. 마지막 단계는 면접이었다. "문학전공을 몇 해나 했나요?" "전 학교에서 바로 왔습니다." "아냐. 이 글은 분명히 전문가의 글이야. 이걸 분명히 본인이 썼겠지?" "네" "흐음. 학교성적에 작문은 만점이라고 쓰여 있긴 하지만" 못내 의아해하며 면접에서 시간을 끌어서 박화성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간의 경력(문단 등단)을 간단히 해명하고 나왔는데 외국인과 중국, 한국인 8명중 박화성만 합격하였다. 박화성이 입학하기 전까지 일본여자대학 영문과에는 한국학생이 한 사람도 없었다.
-「눈보라의 운하」중에서
최초 여성 장편소설「백화」쓰다
도쿄에서의 생활은 박화성의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학문의 전공과 인간이 겪어야 할 각종 체험으로 삶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얻었을 뿐 아니라,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이루어진다는 끈기와 정신력을 배양하였다.그 증거가 장편「백화(白花)」의 초고 완성이다.「추석전야」후속작품인「하수도공사」가 나오기까지 7년의 공백기에 장편「백화」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사정으로 도쿄에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여「백화」에만 매달려초고를 탈고하였다. 밤을 새워가면서 가운데손가락에 큰 못이 생겨 곪을 만큼 몇 천 장씩을 쓰고 또 쓰고 하여 다섯 번의 수정 후 완성하였다.「백화」는 1932년 이광수의 추천으로 청전 이상범화백의 삽화를 곁들여《동아일보》에서 1백 80회가 연재되었다. 여성이 쓴 최초의 장편소설「백화」는 많은 독자들의 찬사와 성원을 받았다. 최일수는「박화성론」에서「백화」를 호평하였다."「백화」는 대하적인 흐름과 탁월한 리얼리티와 더불어 우리문학사에 두드러진 업적으로 기록될 만하다." 이태준은 "우리는 이「백화」에서 작가의 강렬한 문학에의 열을 느낀다. 작가는 이 작품을 써나가는 중에서 피곤한 붓과 싸웠을 것을 상상한다.「백화」는 박화성의 문학에의 굳센 동경과 성의에서 맺혀진 한 꽃송이다" 라고 하였다.
오빠 박제민, 사상적 영향을 주다
박화성은 제민 오빠를 혈연으로서만이 아닌 동지의 한 사람으로 여겼다. "제세구민을 내세워 제민이라고 스스로 지은 이름에 알맞게 그의 포부는 웅대하고 갸륵하여서 천생으로 웅변가의 기질을 타고난 그가 만일 때롤 꼭 잘 만났더라면 그야말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대정치가가 되었을 인물이었다." 고 박화성은 말하고 있다. 박화성은 오빠가 도쿄 와세다대학에 유학을 하고 있을 때 영광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오빠에게 학비를 보내 주었다."나는 일체의 사치를 외면하여 머리에서는 기름을, 얼굴에서는 크림과 물분을 제거하고 의복도 있는 옷으로만 주워 입으면서 얼마 되지 않는 봉급에서나마 열심히 학비를 보태주느라 절약에 절약을 하며 몸은 비록 가난하나 정서는 언제나 풍요하였다." 오빠는 졸업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네 덕분에 나는 대학졸업을 했다. 고맙다. 이젠 네 차례니까 준비에 소홀하지 말고 시험이나 잘 치러라."
오빠는 박화성의 유학비를 조달하기 위해 취직했는데 그 곳에서 일어난 노동조합투쟁에서 선동자의 혐의로 구속되고 말았다. 결국 박화성은 오빠 친구 P씨의 도움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사상가였던 오빠는 박화성에게 일찍부터 진보적 사상의 영향을 주었고, 사회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오빠는 목포제유공장 파업선동혐의로 입옥 중 턱이 썩는 고통을 겪었다. 출옥 후 일제의 모진 사상탄압에도 굴하지 않았으나 1942년 광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주부, 육아, 여성작가 삼중고 속에 쓰다
박화성은 여성작가로서 가난과 육아, 지방작가라는 삼중의 불리한 여건 속에서 작품활동을 하였다. 박화성은〈여류작가가 되기까지의 고심담〉이라는 글에서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소설을 쓰기 위해 내 생활과 수입으로는 도저히 알맞지 않은 노릇을 하고 있다. 여섯 살과 네 살 난 남매를 유치원에 보내어 과분한 학비와 비용을 들인 것이다. 이것은 신여성이 되어 유치원 교육을 주장해서가 아니라 나의 창작의 세계에서 갖은 훼방을 놓은 어여쁜 두 악마를 유치원으로 몰아내기 위해 지어낸 어미의 간사한 꾀였다.
아이들을 보내 놓고 나서야 겨우 구상을 하노라면 어느새 점심을 먹으러 오고, 하학했다고 몰려오고, 와서 책상 위에 펼쳐 놓은 원고지를 달라고 조르고 심술을 피운다.
그러면 방문을 잠그고 회초리를 갖다가 놓고 악을 써가며 몇 자씩 그려가다가 정 안되면 불러내다가 때리기도 했다.
아이들과 억지로 정을 떼 가며, 호랑이 노릇을 해가며, 어머니에게는 불효를 해가며, 도둑놈 도둑질할 구멍 엿보듯이 밤낮으로 조용한 시간만 가져볼 궁리나 머리에 가득하게 가지고 집안일은 밤을 새워 해가면서, 게다가 구설께나 들으면서도 이 붓대를 놓지 못하는 것을 무슨 천형으로 생각하였다."
- 「여류작가가 되기까지의 고심」중에서